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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鲜李朝诗人-尹善道

作者:admin    文章来源:盐田区外国语学校    更新时间:2017-11-01

 朝鲜李朝诗人。尹善道字约如,号孤山。生于汉城的贵族之家。喜欢钻研学问,涉猎诸子百家之书。从1612年起走上仕途。时党争激烈,他受掌握重权的李尔瞻的打击,被流放咸镜北道的庆源。作《被谪北塞》诗。1624年获释,历任户曹佐郎、汉城庶户、待讲院文学、星州县监等职。不久辞官,回到故乡海南。1636年,后金入侵,率弟子数百人赴江华岛,准备参加抗战。因听说江华陷落,和议已成,又驾船去济州。途中见甫吉岛风景秀美,建乐书斋,打算在那里定居。1638年,国王仁祖因他战后未去朝见,又把他流放到盈德一年。1652年,出任礼曹参议。国王孝宗死,因服制问题和重臣宋时烈意见相左,1660年第三次被流放。1667年放回。
 
  尹善道是朝鲜语诗歌时调的名家。他的《山中新曲》(包括《朝雾谣》、《夏雨谣》、《日暮谣》、《夜深谣》、《饥岁叹》、《五友歌》)、《山中续新曲》和《渔父四时词》,代表时调的最高成就。这些作品大多是优美的山水诗,从时序、气候的变化中描写大自然的景色,饱含着热爱祖国山川的深厚情感。其中的《五友歌》,吟咏水、石、松、竹、月,以表现它们的净洁、坚实、光明,寄寓着作者的生活理想。《渔父四时词》是尹善道最有代表性的长篇时调,全篇包括春词、夏词、秋词、冬词四部分,各10章,写渔父驾船出海经历的四季变化,春天的海燕,水面的夕阳,渔村的房舍,夏日的白云,秋天的明月、清风,冬日的雪景,在他的笔下组成一幅多采的画面。随着景物的变幻,渔父联想到武陵桃源和月宫里捣药的玉兔,陶醉其中,乐而忘返,把人世的纷扰置诸身外。然而,尹善道并不是一个忘情山水的隐士。他在写了这些作品之后,又去做官,继续投身到政治斗争的旋涡。他之所以写山水诗,企图用一尘不染的自然界的清新气象来衬托李朝官场的污浊,是他不满现实的一种隐晦、曲折的表现。他希望能出现一个清明的世界。在艺术上,尹善道突破了短小的平时调的束缚,创造了较完美的连时调的形式。
  尹善道的汉文著作有《孤山遗稿》,其中除汉诗外,还收有辞、书、疏、序、记等文章。书已失传,现在只能在《大东诗选》里看到他少量的汉诗。
윤선도(1587~1671) 尹善道
 
호 : 고산,해옹
시대 조선 중기
생졸년 1587 (선조 20) - 1671 (현종 12)
본관 해남(海南)
성 윤(尹)
자 약이(約而)
호 고산(孤山)/해옹(海翁)
성별 남
연령 85
활동분야 문신/관료 / 문신-조선중기 / 문신, 시조작가
과거 및 취재 [문과] 인조(仁祖) 11년 (1633) 계유(癸酉)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 17위
 
 
윤선도(尹善道)에 대하여

1587(선조 20)∼1671(현종 12). 조선 중기의 문신·시조작가. 본관은 해남(海南). 자는 약이(約而), 호는 고산(孤山) 또는 해옹(海翁).

예빈시부정(禮賓寺副正)을 지낸 유심(唯深)의 아들이며, 강원도관찰사를 지낸 유기(唯幾)의 양자이다.

1. 가계와 출사

서울에서 출생하였으나 8세 때 큰아버지에게 입양되어, 해남으로 내려가 살았다. 당시 금서(禁書)였던 〈소학 小學〉을 보고 감명을 받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18세에 진사초시에 합격하고, 20세에 승보시(陞補試)에 1등하였으며 향시와 진사시에 연이어 합격하였다.

2. 병진소

1616년(광해군 8) 성균관유생으로서 이이첨(李爾瞻)·박승종(朴承宗)·유희분(柳希奮) 등 당시 집권세력의 죄상을 격렬하게 규탄하는 〈병진소 丙辰疏〉를 올려, 이로 인하여 이이첨 일파의 모함을 받아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되었다. 그곳에서 〈견회요 遣懷謠〉 5수와 〈우후요 雨後謠〉 1수 등 시조 6수를 지었다.

1년 뒤 경상남도 기장으로 유배지를 옮겼다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이이첨 일파가 처형된 뒤 풀려나 의금부도사로 제수되었으나 3개월 만에 사직하고 해남으로 내려갔다.

그뒤 찰방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3. 보길도 생활

1628년(인조 6) 별시문과 초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봉림대군(鳳林大君)·인평대군(麟坪大君)의 사부(師傅)가 되었고, 사부는 관직을 겸할 수 없음에도 특명으로 공조좌랑·형조정랑·한성부서윤 등을 5년간이나 역임하였다.

1633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예조정랑·사헌부지평 등을 지냈다.

그러나 1634년 강석기(姜碩期)의 모함으로 성산현감(星山縣監)으로 좌천된 뒤, 이듬해 파직되었다.

그뒤 해남에서 지내던 중 병자호란이 일어나 왕이 항복하고 적과 화의했다는 소식에 접하자, 이를 욕되게 생각하고 제주도로 가던 중 보길도(甫吉島)의 수려한 경치에 이끌려 그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정착한 그 일대를 ‘부용동(芙蓉洞)’이라 이름하고 격자봉(格紫峰)아래 집을 지어 낙서재(樂書齋)라 하였다. 그는 조상이 물려준 막대한 재산으로 십이정각(十二亭閣)·세연정(洗然亭)·회수당(回水堂)·석실(石室) 등을 지어놓고 마음껏 풍류를 즐겼다.

그러나 난이 평정된 뒤 서울에 돌아와서도 왕에게 문안드리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1638년 다시 경상북도 영덕으로 귀양갔다가 이듬해에 풀려났다.

4. 시가문학

이로부터 10년 동안 정치와는 관계없이 보길도의 부용동과 새로 발견한 금쇄동(金鎖洞)의 산수 자연 속에서 한가한 생활을 즐겼다.

이때 금쇄동을 배경으로 〈산중신곡 山中新曲〉·〈산중속신곡 山中續新曲〉·〈고금영 古今詠〉·〈증반금 贈伴琴〉 등을 지었다.

그뒤 1651년(효종 2)에는 정신적 안정 속에서 보길도를 배경으로 〈어부사시사 漁父四時詞〉를 지었다. 다음해 효종의 부름을 받아 예조참의가 되었으나 서인의 모략으로 사직하고 경기도 양주 땅 고산(孤山)에 은거하였다. 마지막 작품인 〈몽천요 夢天謠〉는 이곳에서 지은 것이다.

1657년, 71세에 다시 벼슬길에 올라 동부승지에 이르렀으나 서인 송시열(宋時烈)일파와 맞서다가 삭탈관직되었다. 이 무렵 〈시무팔조소 時務八條疏〉와 〈논원두표소 論元斗杓疏〉를 올려 왕권의 확립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1659년 효종이 죽자 예론문제(禮論問題)로 서인파와 맞서다가 패배하여 삼수에 유배되었다가, 1667년 풀려나 부용동에서 살다가 그곳 낙서재에서 85세로 죽었다.